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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트라이보울 기획전시 <살아있는 척> 포스터
2026 트라이보울 기획전시 <살아있는 척>
  • 구분전시
  • 기간2026.10.13 ~ 2026.12.13
  • 시간
  • 장소트라이보울
  • 분류복합
  • 주최인천경제자유구역청, 인천문화재단, 트라이보울
  • 문의032-833-5992
  • 관람연령0세 이상
  • 공연가격무료

세부정보 본문

※ 트라이보울 전시 관람 시간
평일&주말: 12:00-17:30 (17:10 입장 마감)
매주 월요일 및 공휴일 휴관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연장 운영 (12:00-19:30, 입장마감 19:10)
※ 본 전시는 무료입니다.
※ 전시 관람 시 전시관람 에티켓을 준수해주시기 바랍니다.



[시놉시스]
인간은 대개 움직이는 것을 살아있다고 믿고, 반응하는 것을 생명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움직이지 않는 생명과 살아있지 않아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이 전시는 인간이 오랫동안 독점해 온 '살아있음'의 기준을 의심하며, 자연과 기계, 인간 등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상호작용을 추적합니다. 어쩌면 인간은 세계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동시에 반복되는 일상과 습관, 시스템 속에서 가장 능숙하게 '살아있는 척' 연기하며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살아있는 척》은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 사이에서, 우리가 생명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이며 누구를 살아있다고 믿는지 묻습니다.


[기획의 글]
오직 인간만이 살아있는 척을 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는 것을 구분하며 세계를 이해한다. 그리고 인간은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을 손쉽게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숨 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움직이는 것과 멈춰 있는 것, 반응하는 것과 반응하지 않는 것 등 생명은 오랫동안 이러한 차이 안에서 식별되어 왔고, 살아있음의 기준에는 ‘움직임’이 마치 그 증거처럼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대체로, 움직이는 것을 살아있다고 믿고 반응하는 것을 생명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이 믿음은 쉽게 균열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움직이지 않는 식물은 분명 살아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바람은 살아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처럼, 누군가는 죽은 뒤에도 기억과 이미지 속에서 지속되며, 생명 없는 물질은 인간의 감각과 관계 속에서 존재감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믿음, 다시 말해 생명은 존재의 내부에 주어진 속성일까, 아니면 우리가 어떤 존재를 대면하고 관계를 맺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판단일까.

이 전시는 바로 그 불확실한 경계에서 시작한다. ‘살아있음’이 존재론적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인간의 인식에서 비롯된 효과인지에 대해 질문하면서 시작한다. 우리가 살아있다고 부르는 것은 정말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일까? 이것은 생명의 분류를 재정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난 긴 시간 동안 무엇을 생명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를 결정해 온 인간의 시선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분류하며, 경계 짓고 구분한다.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은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을 세계의 기준으로 설정하였다. 신체, 감각, 의식, 언어, 그리고 인간이 느끼는 시간성이 서로 다른 존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움직임이 의미를 가지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되고, 반응을 보이면 의도를 가진 존재가 되듯이, 우연히 놓인 점 두 개가 눈처럼 보이는 순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얼굴을 발견하고, 기계가 언어로 응답하는 순간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 생명 없는 대상에 표정과 감정을 부여하고, 의식도 없는 사물에서 기억과 서사를 읽어내는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끊임없이 생명을 투사한다.

따라서 생명은 생물학적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구분은 물질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구분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어떤 존재가 살아있다고 믿는 순간 동시에 그것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을 나누고, 이에 반응한다. 그 순간 대상은 단순히 객체이기를 너머, 인간의 인식 속에서 하나의 행위자이자 상대자, 하나의 세계로 출현한다. 그렇다면 ‘살아있음’은 대상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상태라기보다 관계의 사건에 가깝지 않은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무엇보다 역설적으로 존재한다. 가장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생명의 기준으로 두었지만 동시에 가장 능숙하게 ‘살아있는 척’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사회 속에서,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고, 요구되는 방식으로 반응하고, 적절한 표정과 태도를 취하며, 관계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 있다.’ 이때의 인간이 취하는 살아있음의 움직임과 반응은 자연적 상태가 아닌,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행동의 결과가 된다. 살아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인지, 움직이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믿는 것인지조차 모호해진 경계 속에서 몸은 의식보다 먼저 반응하고, 습관은 의지보다 오래 지속된다. 그리고 의식은 때때로 죽은 것을 모방한다.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으면서 사회적 시스템 속에 주어진 리듬에 맞게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익숙한 규칙에 순응하며 움직인다. 매일의 반복 속에서 삶은 자동화된 기계처럼 지속된다. 이때의 살아있음은 생물학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 연출되는 상태가 되기에 이른다. 어쩌면 인간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자연은 시간을 기억하고 기술은 쉼 없이 움직이며 데이터는 끊임없이 증식한다. 이미 수많은 디지털 이미지와 알고리즘은 끊임없이 반응하며 인간의 언어를 모방한다. 우리는 그것을 살아있다고 부르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처럼 경험한다. 여기서 ‘~척’이란 단순한 모방이나 위장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꾸미는 거짓 태도나 모양’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마치 본래 그런 것처럼 느끼고 인지하는 우리의 믿음을 전제한다. ‘살아있는 척’이라는 말의 뒷면에는 ‘진짜’ 살아있는 것에 대한 전제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전시는 바로 그 전제가 무엇을 기준으로 구성되는지를 되묻고자 한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순간, 우리는 생명의 본질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생명의 경계가 인간의 인식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이라면 살아있는 척하는 것과 실제로 살아있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명확하게 구분될까.

《살아있는 척》은 그 차이를 해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이에 머물고자 한다. 다이애나밴드는 인간의 언어 바깥에 있는 소리를 매개로 관객 참여형 사운드 퍼포먼스를 전개하며, 환경과 공동체, 생태계가 서로 드러내고 응답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 전시를 위한 신작 〈개미들은 검은 구멍을 넘쳐흐른다〉(2026)에서 예측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불안이 ‘검은 구멍’으로 나타난다. 공기를 감싸는 저음은 고막과 공간을 넘어 청자의 의식을 흔들어놓으며, 넘쳐흐르는 것들 위로 넘쳐흐르는 어둠을 스모그와 불안한 저음으로 드러낸다. 신제헌은 점토, 석고, 금속 등을 사용하여 재료의 물성에 손의 흔적과 드로잉을 덧입혀, 일종의 사람과 닮은 모양의 형태들을 만들어낸다. 하얗고 투박한 표면에 작가의 무의식적 감각과 응축된 감정이 형태로 치환되어 심상적 신체를 조각으로 형상화한다. 하얀 조각들이 인간의 신체를 모방하여 움직임을 포착한 듯 보이는가 하면, 야외에 설치된 〈인기척〉(2026)은 조각들이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듯 흔들리며, 보이지 않는 몸의 기척과 살아있음의 감각을 드러낸다. 정혜정은 해양 생물과 디지털 글리치를 교차시키는 영상 작업으로, 인간중심적 시간성을 해체하는 풍경을 구축한다. 그는 이미지와 소리의 비현실적인 결합을 통해 개별 존재가 서로 연결되고 뒤섞이는 과정을 구현하며 실제 신체와 디지털 이미지 사이에서 생성되는 낯선 감각에 주목한다. 마지막으로, 황문정은 도시의 틈새에서 발견한 미시적인 모든 비인간 존재들에 주목한다. 그는 설치와 게임의 형식을 빌려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도시 생태계의 조건을 드러내며 인간중심적으로 설계된 도시 내면의 다양한 존재들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그의 작업에서 도시는 마치 유기적으로 조성된 생명체처럼 은유 되며, 무엇보다 살아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들은 서로 다른 물질과 감각, 기술과 기억, 신체와 환경을 통해 ‘살아있음’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드러낸다. 비인간은 인간과 반대되는 새로운 주체가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은 서로 독립된 두 항이 아닌, 서로의 존재 조건을 구성하는 관계망 속에서 출현하며 복수로 등장한다. 따라서 이 전시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인간중심적 사고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 중심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의심일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을 관장하는 유일한 척도가 될 수 없다. 자연과 기술, 물질과 데이터, 신체와 환경은 더 이상 인간이 의미 부여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시간과 속도, 감각과 흔적을 가지고 인간과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동일한 질문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움직이는 것, 반응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기억되는 것은 죽은 것일까. 인간의 언어를 모방하는 기계는 단지 생명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일까. 혹은 때때로 시간을 허비하고, 서로를 혐오하는 인간을 자연보다, 기술보다 더 나은 형태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전시는 위와 같은 질문들에 답하기보다 질문이 발생하는 조건을 바라본다.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그어놓은 선,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경계, 자연과 기술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이해해 온 관습과 주체와 객체를 분리해 온 오랜 인식 체계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살핀다. 살아있음의 감각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대상이 아닌,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마주치고 영향을 주고받는 와중에 흔적을 남기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바로 이 지점에서 생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믿어온 인간 자신이, 사실은 얼마나 오랫동안 생명을 흉내 내며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사물도, 기술도, 이미지도, 도시도, 자연도 때때로 살아있다. 오직 인간만이 살아있는 척을 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 “비인간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내려는 헛된 시도를 단념하라. 그 대신 당신 역시 당신이 참여하고 있는 배치 내의 비인간들과 더 정중히, 전략적으로, 세심하게 관여하도록 노력하라.”


글. 이슬비(전시기획자, 미학관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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